여러분은 왜 사시나요? 살아갈 이유가 꼭 필요할까요

살아갈 이유를 이성적으로 증명하지 못해도, 우리는 이미 매일 살아가고 있어요.

철학자 해리 프랭크퍼트는 사랑이 만들어내는 ‘의지적 필연성’이 논리적 증명보다 더 밑바닥에 있다고 말했어요.

그래서 살아갈 이유를 찾는 일보다, 이미 나를 붙잡고 있는 마음을 알아차리는 일이 훨씬 도움이 될 때가 있어요. (출처: Frankfurt, Volitional Rationality and the Necessities of Love)

새벽 다섯 시, 아직 아무도 깨지 않은 집에서 저는 자주 창가에 앉아요. 컵에서 올라오는 김이 손끝을 데우고, 멀리서 첫차가 지나가는 소리가 유리창을 얕게 흔들어요. 그 조용한 틈에서 문득 이런 질문이 올라올 때가 있어요. ‘나는 왜 살고 있지?’ 고등학생 시절의 저는 이 질문 앞에서 아주 오래 서성였어요. 시험지에 정답이 있듯 삶에도 정답이 있을 거라 믿었고, 그걸 못 찾은 저는 틀린 답안지 같았거든요. 그런데 15년 가까이 철학을 붙잡고 살아온 지금, 저는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살아갈 이유는 어쩌면 찾아내는 게 아니라, 이미 내 안에서 조용히 작동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거든요.

새벽빛이 스며드는 창가에 따뜻한 컵이 놓여 있는 조용한 방의 풍경

답을 찾지 못한 새벽에도, 창문은 어김없이 밝아져요.

우리는 왜 살아갈 이유가 꼭 있어야 한다고 느낄까요?

저는 이성을 ‘보편적인 틀에 개별적인 것을 끼워 맞추는 능력’이라고 생각해요. 우리가 이성을 가장 처음 배우는 순간은 부모가 아기에게 그림책을 펴 보이며 “이게 나무야”라고 말해 줄 때예요. 아기는 그 순간 종이 위의 얼룩 하나를 보는 게 아니라, 집 앞의 은행나무와 사진 속 소나무까지 한꺼번에 묶어 주는 커다란 바구니를 손에 쥐게 돼요. 이 바구니가 없으면 우리는 과학도, 언어도, 약속도 만들 수 없어요.

문제는 이 훈련이 너무 잘 되어 버릴 때예요. 받아쓰기에서 틀리면 빨간 줄이 그어지고, 맞으면 별표를 받죠. 그렇게 우리는 ‘내 개별적인 것은 이미 정해진 보편적 정답에 맞춰져야 한다’는 감각을 몸에 새겨요. 저도 그랬어요. 그러다 보니 “나는 왜 살지?”라는 물음 앞에서도 정답 칸을 채우지 못하면 스스로가 실패한 학생처럼 느껴졌어요. 삶의 이유가 없어서 괴로운 게 아니라, 이유가 있어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에 괴로웠던 거예요.

이성은 정말 삶의 정답을 알려줄 수 있을까요?

대학교 윤리학 수업에서 저는 작은 균열을 만났어요. 아주 유능한 교수님이 여러 이론을 차례로 설명해 주셨는데, 이론마다 ‘옳게 사는 법’이 전부 달랐어요. 학기 말에 저는 손을 들고 물었어요. “교수님은 어떤 이론이 가장 옳다고 생각하세요?” 돌아온 답은 “각각 장단점이 있죠”였어요. 그날 저는 허탈했지만, 지금은 그 대답이 정직했다고 생각해요. 지도를 아무리 정교하게 그려도, 그 지도가 저를 대신 걸어 주지는 않으니까요.

통계도 비슷한 이야기를 해요. 통계청 ‘국민 삶의 질’ 지표에서 한국인의 삶의 만족도는 6점대 중반에 머물러 있고, OECD 회원국 가운데 여전히 하위권이에요. 물질적 조건과 정보는 계속 좋아졌는데도요. 잘 정리된 설명이 곧 잘 사는 삶은 아니라는 뜻이겠죠.

이유가 없는데도 계속 살아온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어느 순간부터 저는 질문의 각도를 틀었어요. “왜 살아야 하지?” 대신 “이유를 못 찾았는데도 나는 왜 계속 살고 있지?”라고요. 그러자 답이 이론서가 아니라 부엌 쪽에서 걸어 나왔어요. 저희 할머니예요. 아버지가 막내여서 제가 어릴 때 할머니는 이미 많이 연로하셨고, 귀도 어두우시고 걸음도 느리셨어요. 조금 먼 길을 나서실 때면 제가 팔을 붙들어 드려야 했죠.

대단한 효도를 한 것도 아니에요. 다만 ‘나를 저렇게 아껴 주시는 분이 조금 더 편하셨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있었고, 그 마음은 제가 살아 있어야만 쓸 수 있는 마음이었어요. 그러니까 저는 이유를 발견하기 전에 이미 이유를 품고 있었던 거예요. 다만 그 이유가 문장의 형태가 아니라 감정의 형태였을 뿐이고요.

햇살이 드는 창가에서 따뜻한 잔을 든 한국인 할머니의 온화한 상반신 모습

누군가를 아끼는 마음은, 증명되기 전에 이미 나를 살게 해요.

사랑은 왜 이유보다 먼저 있을까요?

비슷한 생각을 훨씬 정교하게 펼친 철학자가 있어요. 해리 프랭크퍼트는 필연성에 두 종류가 있다고 봤어요. 하나는 논리적 필연성이에요. ‘모든 사람은 죽는다, 소크라테스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소크라테스는 죽는다.’ 여기서는 다르게 생각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죠. 다른 하나는 의지적 필연성이에요. 아이를 사랑하는 부모는 아이를 지키지 않는 장면을 상상할 수는 있지만, 실제로 그렇게 행동할 수는 없어요. 생각은 되는데 할 수는 없는 강제력, 그게 사랑이 가진 힘이에요.

이성적(논리적) 필연성 의지적(사랑의) 필연성
다르게 생각하는 것이 불가능해요 생각은 되지만 차마 그렇게 못 해요
근거를 대며 남을 설득할 수 있어요 근거보다 마음이 먼저 도착해 있어요
틀리면 반박으로 무너져요 반박당해도 좀처럼 사라지지 않아요

필리파 풋 같은 철학자는 주관적 감정 위에 도덕을 세울 수 없다고 봤지만, 프랭크퍼트는 되물어요. 그렇다면 끝까지 이성적으로 정당화되는 것이 정말 있느냐고요. ‘생명을 해치면 왜 나쁜가’에 답을 하면, 그 답에 또 ‘왜’를 붙일 수 있어요. 이 물음은 원리상 무한히 이어져요. 논리학의 기본 규칙조차 그 자체를 증명해 주는 더 밑의 근거는 없고, 오히려 그 규칙 위에서 모든 추론이 세워지잖아요. 사랑도 그런 자리에 있는 것 같아요.

오늘 해볼 수 있는 작은 연습

“나는 왜 사는가” 대신 “오늘 하루, 내가 굳이 신경 쓴 것은 무엇이었나”를 적어 보세요. 답이 거창할 필요는 없어요. 식은 밥을 데워 준 사람, 물을 준 화분, 답장을 기다린 친구면 충분해요.

일주일만 모아 보면, 정답 칸이 아니라 ‘마음이 향한 방향’이 지도처럼 보이기 시작해요.

노란 은행나무가 늘어선 한국 동네의 저녁 산책길 풍경

목적지를 몰라도, 걸음은 이미 어딘가를 향하고 있어요.

이유를 놓아도 삶은 계속돼요

그래서 저는 이제 삶의 이유 같은 건 없거나, 있더라도 우리가 알 수 없거나, 알더라도 그렇게까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해요. 이유를 못 찾은 건 실패가 아니라, 애초에 그 문제집이 우리 인생용으로 만들어진 게 아니었을 뿐이에요. 대신 이미 내 안에서 작동하고 있는 마음들, 아끼는 사람과 지키고 싶은 것들에 더 잘 반응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편이 훨씬 나은 길 같아요.

오늘 저녁에는 정답 대신 안부를 하나 물어 보세요. 오래 미뤄 둔 그 사람에게 “밥은 드셨어요?” 한 줄이면 충분해요. 이유는 나중에 따라와도 늦지 않아요.

자주 묻는 질문

Q1. 살아갈 이유를 찾는 노력이 무의미하다는 말인가요?

그렇지는 않아요. 다만 ‘이유가 반드시 이성적으로 증명되어야 한다’는 전제는 내려놓아도 괜찮다는 뜻이에요. 질문을 멈추는 게 아니라, 질문의 각도를 바꾸는 일에 가까워요.

Q2. 사랑하는 사람이 없으면 살아갈 이유도 없는 걸까요?

여기서 말하는 사랑은 연인이나 가족만을 뜻하지 않아요. 매일 물을 주는 화분, 끝까지 보고 싶은 이야기, 두고 온 고양이도 같은 자리에 설 수 있어요. 마음이 향하는 대상이면 충분해요.

Q3. 프랭크퍼트의 논의를 더 읽어 보려면 무엇부터 좋을까요?

국내에 번역된 ‘사랑의 이유’가 가장 접근하기 좋아요. 더 깊이 들어가고 싶다면 논문 ‘Volitional Rationality and the Necessities of Love’를 함께 읽어 보시길 권해요.

덧붙임. 지금 삶이 유난히 버겁게 느껴진다면, 그 마음은 혼자 감당하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가까운 사람이나 전문 상담을 통해 이야기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숨통이 트일 때가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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