빼앗긴 것들의 목록 맨 아래,
아직 아무도 손대지 못한 한 칸이 남아 있었다.
그해 십이월, 저는 종이박스 하나를 안고 건물을 나왔습니다. 상자 안엔 별것도 없었어요. 반쯤 남은 핸드크림, 이름이 인쇄된 명찰, 누가 준 건지 기억나지 않는 낡은 머그컵 하나. 그 가벼운 상자가 왜 그렇게 무거웠는지 모르겠습니다.
엘리베이터 거울에 비친 얼굴을 보다가 문득 목록을 세어봤어요. 매일 앉던 자리, 아침마다 나를 부르던 호칭, 삼 년 뒤에 하기로 했던 계획들, 안부를 물어주던 사람들. 손가락을 접다가 그만뒀습니다. 접을 손가락이 모자랐거든요.
돌아갈 곳이 사라진 저녁에도, 거리의 불빛은 순서대로 켜졌다.
그 겨울엔 아침이 제일 힘들었습니다. 눈을 뜨면 오늘 해야 할 일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이 이불처럼 몸을 눌렀어요. 알람을 꺼둔 지 오래인데도 여섯 시 사십 분이면 눈이 떠졌습니다. 몸은 아직 예전의 리듬을 기억하는데, 그 리듬이 도착할 곳이 사라져버린 거죠.
며칠을 그렇게 누워 있다가, 어느 아침엔 그냥 일어나 물을 끓였습니다. 이유는 없었어요. 그냥 주전자가 눈에 들어왔고, 물이 끓는 소리가 듣고 싶었던 것 같아요. 뽀글거리는 소리, 하얗게 김이 오르는 모양, 컵을 감싸 쥔 손바닥의 온기. 그게 그날 제가 한 유일한 일이었습니다.
언젠가 읽은 문장이 그 무렵 자꾸 떠올랐습니다. 모든 것을 빼앗길 수 있어도, 주어진 상황에서 어떤 태도를 취할지 선택하는 자유만은 빼앗을 수 없다는 말. 강제수용소에서 살아남은 한 정신과 의사가 남긴 이야기였어요.
솔직히 말하면, 처음엔 그 문장이 조금 미웠습니다. 태도를 선택하라니. 그건 다 잃은 사람에게 마음가짐 탓을 하는 말처럼 들렸거든요. 억지로 웃으라는 말, 긍정적으로 생각하라는 말, 다 잘될 거라는 말. 그런 말들은 그때의 제겐 얇은 종이 같았어요. 조금만 젖어도 찢어지는.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알게 됐습니다. 그 문장은 웃으라는 말이 아니었어요. 오히려 반대에 가까웠습니다. 슬퍼해도 된다고, 다만 그 슬픔을 어떤 얼굴로 마주할지는 여전히 네가 정할 수 있다고. 아주 작은 여백 하나가 아직 내 손에 남아 있다고. 그런 이야기였던 것 같아요.
무너진 아침에도 물은 끓고, 김은 어김없이 위로 오른다.
그 무렵 이웃집 할머니를 자주 마주쳤습니다. 매일 아침 복도 끝 화분에 물을 주시던 분이었어요. 어느 날 여쭤봤습니다. 여기 볕도 잘 안 드는데 왜 매일 주세요, 하고요. 할머니는 물뿌리개를 기울이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살든 안 살든, 물 주는 건 내 몫이니까.
그 말이 오래 남았습니다. 결과는 내 것이 아니지만, 물을 주는 그 손짓만큼은 온전히 내 것이라는 말. 아무도 그건 대신 해줄 수 없고, 아무도 그건 빼앗아 갈 수 없다는 말처럼 들렸어요.
빼앗긴 것을 세는 대신,
아직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작은 일을 세어보기로 했다.
그 뒤로도 제 겨울은 한참 계속됐습니다. 봄이 온 것도 아니고, 극적으로 무언가 풀린 것도 아니었어요. 다만 하루에 하나씩, 아주 사소한 것들을 골랐습니다. 이불을 개는 일. 창문을 십 분쯤 여는 일. 오랜 친구에게 잘 지내냐고 먼저 묻는 일. 저녁에 산책을 나가 가로등이 하나씩 켜지는 순서를 지켜보는 일.
그건 극복도 아니고 회복도 아니었습니다. 그냥 아직 내게 남아 있는 걸 확인하는 일에 가까웠어요. 세상이 내 손에서 많은 걸 가져갔지만, 오늘 창문을 열지 말지는 아직 내가 정한다는 것. 그 작은 사실 하나가 이상하게 사람을 버티게 하더라고요.
피어날지는 몰라도, 물을 주는 일은 언제나 내 몫이었다.
지금도 저는 가끔 그 겨울로 돌아갑니다. 상자를 안고 나오던 그 저녁, 유리문에 비친 제 얼굴을 다시 떠올려요. 그때의 저에게 무슨 말을 해주고 싶으냐고 누가 묻는다면, 아마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냥 옆에 앉아서 같이 커피를 마시겠죠. 식기 전에 마시라고, 그 정도만 말해줄 것 같아요.
누군가에게는 지금이 그 겨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목록을 세다가 손가락이 모자라는 밤. 그런 밤에 억지로 뭔가를 다짐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다만 아주 조용히, 아직 내 손에 남아 있는 게 무엇인지만 한 번 더듬어봐도 좋을 것 같습니다.
세상이 다 가져간 것 같은 밤에도,
이 밤을 어떤 얼굴로 건널지는
여전히 당신이 정합니다.
오늘, 아무도 빼앗아 가지 못한 채로 당신 손에 남아 있는 가장 작은 것은 무엇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