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고기가 새가 되어 날아오를 때,
그것은 무엇을 버린 것이 아니라
그저 더 넓은 곳으로 흘러간 것뿐일지도 몰라요.
경계가 흐려지는 새벽,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습니다.
요즘 나는 자꾸만 줄을 서게 됩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어느 줄에 서야 더 빨리 갈 수 있을지, 옆 사람보다 뒤처지진 않았는지 자꾸 곁눈질을 하게 돼요. 더 좋은 자리, 더 나은 자리. 그 자리라는 게 대체 어디인지도 모르면서, 마음은 늘 어딘가를 향해 뛰어가느라 숨이 차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오래된 책장에서 먼지 쌓인 책 한 권을 꺼냈어요. 거기엔 아주 큰 물고기 이야기가 적혀 있었습니다. 북쪽 바다에 곤(鯤)이라는 물고기가 사는데, 그 크기가 몇천 리인지 알 수 없을 만큼 거대하다고요. 그런데 이 물고기가 어느 날 붕(鵬)이라는 새로 변해 구만 리 하늘로 날아오른다는 거예요.
나는 그 대목에서 한참을 멈춰 있었습니다. 물고기였다가 새가 된다니. 바다에 속했다가 하늘에 속한다니. 그 경계를 넘나드는 일이 어쩌면 그렇게 자연스러운 일인 것처럼 쓰여 있어서요.
어디로 가야 한다는 마음을 내려놓으면, 물결이 대신 데려다줍니다.
생각해보면 나를 가장 지치게 했던 건 일이 아니라 '구분'이었던 것 같아요. 성공한 사람과 실패한 사람, 빠른 사람과 느린 사람, 쓸모 있는 것과 쓸모없는 것. 나는 늘 그 선을 그어두고, 부지런히 선의 오른쪽으로 가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런데 그 선은 정말로 거기 있었던 걸까요.
장자는 어느 산속에서 거대하지만 옹이지고 굽어서 목수가 거들떠보지도 않는 나무를 봤다고 해요. 사람들은 그 나무를 쓸모없다 했습니다. 그런데 장자는 말합니다. 쓸모없었기에 도끼에 잘리지 않고 그 큰 그늘을 드리우며 오래도록 살아남았다고. 쓸모없음이야말로 그 나무의 가장 큰 쓸모였다고요.
그 문장 앞에서 나는 조금 울컥했습니다. 내가 그토록 '쓸모 있는 사람'이 되려고 나를 깎고 다듬는 동안, 정작 나라는 나무는 점점 작아지고 있었던 건 아닐까 해서요. 곧게 자라야 한다고, 반듯해야 한다고, 누군가의 기준에 맞는 목재가 되어야 한다고 믿으면서.
자유라는 게 멀리 떠나는 일인 줄로만 알았어요. 사표를 던지고, 짐을 싸고, 모든 걸 버리고 어딘가로 가야 비로소 자유로워지는 거라고요. 그런데 장자가 말하는 자유는 그런 게 아니었습니다. 그건 '경계를 짓지 않는 마음'에 가까웠어요.
나비가 된 꿈을 꾸고 깨어난 장자가, 내가 나비 꿈을 꾼 것인지 나비가 나의 꿈을 꾸는 것인지 모르겠다고 했을 때. 나는 그게 헷갈림이 아니라 일종의 다정함이라고 느꼈습니다. 무엇이 진짜고 무엇이 가짜인지, 무엇이 나고 무엇이 너인지 굳이 가르지 않는 마음. 그저 흐르는 대로 두는 마음이요.
내가 나비를 보는 걸까요, 나비가 나를 보는 걸까요.
요즘 나는 조금씩 줄에서 빠져나오는 연습을 합니다. 거창한 결심 같은 건 아니에요. 그저 누군가와 나를 견주려는 마음이 올라올 때, 잠깐 멈춰서 창밖을 봅니다. 베란다 화분의 잎사귀가 제멋대로 어떤 건 위로, 어떤 건 옆으로 자라난 모습을 가만히 들여다봐요. 저 잎들은 누구도 자기보다 빨리 자랐다고 속상해하지 않는데 말이죠.
아침에 마시는 커피의 온기, 발끝에 닿는 바닥의 서늘함, 멀리서 들려오는 누군가의 웃음소리. 그런 것들 앞에서는 잘난 나도 못난 나도 없습니다. 그저 지금 여기 이렇게 살아 숨 쉬고 있는 내가 있을 뿐이에요. 어쩌면 자유는 그 작은 순간들 속에 이미 와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물고기가 새가 되는 일이, 큰 나무가 그저 그늘이 되는 일이, 나비와 사람의 경계가 흐려지는 일이. 그 모든 것이 애쓰지 않고도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것이라면, 나도 그렇게 흘러가도 괜찮지 않을까요. 무엇이 되지 않아도, 어느 줄에 서지 않아도.
오늘 당신은 어떤 줄에 서 있나요.
그리고 그 줄에서 한 발 물러나 본다면,
그곳엔 어떤 풍경이 펼쳐져 있을까요?